레저경영연구소 출판 도서

내 인생의 《골목길 근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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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골목길 근대사》

한국레저경영연구소 최석호 소장
2015년 10월 6일(화)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여가사회학에 관한 논문을 쓰고 있던 나는 학위논문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갔다. 크리스 로젝(Chris Rojek)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전세계 여가학자들의 논문과 저서 중에서 단연 돋보였던 연구자다. 잉글랜드 중부지방에 있는 노팅엄트렌트대학교(Nottingham Trent University) 클리프톤 캠퍼스 연구실에서 만난 크리스 로젝 교수는 영락없는 우리 동네 담배 가게 아저씨였다. 그리고 노팅엄트렌트대학교 문화학 박사과정에 입학했다.

출판도서

노팅엄트렌트대학교 도서관

영국문화학

힘들었다. 여타 영국대학과 달리 모듈(module)이라는 것이 있어서 코스워크(course work)를 해야만 했다.쉽게 말하면 지도교수와 도제식으로 논문을 써 나가는 것이 아니라 학점 이수를 해야만 한다는 말이다.이유가 있었다. 노팅엄트렌트대학교 문화학 박사과정은 버밍엄대학교 현대문화연구소를 중심으로 스튜어트 홀(Stuart Hall)이 주도했던 문화학 석·박사과정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버밍엄대학교 현대문화연구소 초대소장을 지낸 리차드 존슨(Richard Johnson)이 박사과정 모듈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사과정이 거의 동일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영국문화학(English Cultural Studies)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갔다.

문화세계화

모듈을 이수하면서 동시에 논문을 써 나갔다. 크리스 로젝이 지도교수(director)를 맡고 마이크 페더스톤과 존 톰린슨이 논문 작성을 지도(examiner) 했다. 마이크 페더스톤(Mike Featherstone)은 이론문화사회센터(Theory, Culture & Society Centre) 소장으로서 세이지 출판사 북씨리즈 TCS를 편집하면서 등재지 《이론문화사회》(Theory, Culture & Society)와 《몸과 사회》(Body & Society)도 출판하고 있었다. 세계화를 전세계 학계의 아젠다로 올려놓은 연구소와 저널이다. 문화세계화에 매달렸다.

출판도서-1

Theory Culture & Society Centre 웹페이지

존 톰린슨(John Tomlinson)은 제3의 길이라는 관점에서 문화세계화를 연구하는 문화학자다. 톰린슨의 지도를 받으려고 하니 기든스(Anthony Giddens)를 먼저 읽어야만 했다. 덕분에 구조화이론(Structuration Theory)과 근대성(Modernity)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고, 자본이나 노동이 아닌 제3의 길로 가야하는 이유와 보수당이나 노동당이 아닌 제3의 정당이 필요한 이유를 충분히 알았다(Giddens, 1998: 64-68).

출판도서-2

노팅엄트렌트대학교 문화사회학 석좌교수 John Tomlinson의 저서

더 사랑하는 애인을 통제하는 덜 사랑하는 애인

물론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크리스 로젝이다. 처음에는 굉장히 어려웠다. 문제는 크리스 로젝이 단순한 여가학자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의 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명화과정론(Civilising Process)이라는 큰 산을 넘어야만 했다.

출판도서-3

Chris Rojek의 저서

크리스 로젝의 스승 에릭 더닝(Eric Dunning)은 무명의 강사 노베르트 엘리아스(Norbert Elias)를 레스터대학교(Leicester University)로 끌어들이고, 그의 문명화과정론을 영국에 소개한 장본인이었다. 당시 레스터대학교는 영국 사회학을 주도하고 있었다. 기든스 역시 레스터대학교 사회학과에서 강사를 하던 시절이다.

《문명화과정》, 《궁정사회》,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독일인》 등 엄청난 분량의 책을 읽으면서 문명화과정론에 한 발짝씩 다가섰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문명화과정론자가 되었다. 문명화과정론의 핵심은 권력관계와 과정이다. 겉으로 보면 영주와 농노, 자본가와 노동자 등과 같은 계급간 갈등에 따라 사회 구조가 결정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랜 역사를 관찰하면 그림은 달라진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인간관계의 기본적인 관계적 양상은 변하지 않는다. 연인 사이에서 비교적 많이 사랑하는 사람보다 적게 사랑하는 사람이 더 많은 권력을 갖는다(Elias, 1987: 10). 즉, 계급은 변하지만 권력관계는 언제나 작동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 스승과 제자, 여당과 야당, 강대국과 약소국 등 항상 쌍을 이루고 있는 것은 권력관계가 작동하기 때문이다.(Elias & Scottson, 2005: 19-22).

출판도서-4

엘리아스의 저서

자본가와 노동자 역시 단기적으로 보면 두 계급간의 관계로 볼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살펴보면 유사 이래 늘 그랬던 것처럼 두 계급 사이에 불평등한 권력(power)이라는 공통적인 관계적 양상으로 귀결된다. 따라서 문명화과정론자는 구조(structure)나 행위(agency)가 아닌 과정(process)을 통해서 사회와 역사를 연구한다.

출판도서-5

엘리아스의 한어번역판 저서

칼을 통제하는 붓

우리가 살고 있는 근대사회로 귀결된 서구유럽 600년의 역사적 과정을 연구한 문명화과정론자 엘리아스(Norbert Elias, 1996a; 1996b; 1999; 2003)는 한국사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졌다. “조선시대 문·무 양반사회에서 아무런 폭력수단을 갖지 않았던 문반이 어떻게 폭력수단으로 무장한 무반을 통제할 수 있었는가?”(Elias, 1987 : 254).
이때부터 우리 역사에 관심을 가졌다. 요동을 호령하던 고구려 장수와 황제를 쥐락펴락하던 고려 무신과 같은 경우는 중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일본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왕은 왕 노릇을 못했고 문인은 문서나 작성하는 정도였다. 그야말로 사무라이의 나라다. 그러나 조선은 남다르다. 아무런 무력을 갖고 있는 않는 유학자들이 다스리는 나라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낙론

북방을 지키던 장수 이성계가 북방오랑캐를 향해 겨누어야 할 칼을 개경으로 돌렸다. 조선의 탄생이다. 그의 아들 이방원은 자신이 보유한 사병을 동원해서 조선을 설계한 유학자 삼봉 정도전을 죽이고 다시 한 번 반란을 일으킨다. 조선의 나아갈 길을 왕권국가(王權國家)로 정했다.그러나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 등 오랑캐들에게 짓밟히면서 조선은 본격적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율곡학파의 낙론(洛論)으로 똘똘 뭉친 서인들이 신권국가(臣權國家)로 방향을 틀었다. 서인들은 왕을 자애로운 어버이라고 했다. 정치는 사대부들이 한다는 뜻이다. 훈구파에 맞선 사림의 영수 정암 조광조가 제일 먼저 사약을 받았다. 기묘사화다. 국정을 마비상태로 몰고 간 북인과 광해를 몰아내고 서인이 조정을 장악한다.인조반정이다. 왕은 사대부와 다른 특별한 존재라고 주장한 남인과 숙종에 맞서 왕과 사대부의 예법이 전혀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문곡 김수항이 정암 조광조의 절명시를 떠 올리는 절명시를 쓰고 사약을 받았고 서인은 조정에서 축출된다. 기사환국이다. 1694년 남인의 역모사건이 탄로 나면서 서인은 다시 조정으로 복귀한다. 서인의 최종승리 갑술환국이다. ‘자애로운 어버이 왕과 나라를 이끄는 성리학자’를 골자로 한 낙론의 최종승리다. 조선은 왕의 나라에서 사대부의 나라가 된다.

진경시대

정암 조광조, 율곡 이이, 우암 송시열 등으로 이어지는 서인 학맥을 이은 낙론의 비조는 농암 김창협과 그의 동생 삼연 김창흡이다(이경구, 2007: 214). 삼연 김창흡은 남방오랑캐 왜와 북방오랑캐 여진족의 침략으로 쑥대밭이 된 조선 팔도를 걷기 시작한다. 삼연의 동생 노가재 김창업에게 그림을 배운 겸재 정선은 스승 삼연을 따라 걸으면서 조선을 그렸다. 진경산수화다. 삼연의 또 다른 제자 사천 이병연은 조선 팔도의 빼어난 경치와 아름다운 풍속을 읊는다. 진경시다.

출판도서-6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 < 금강내산전도>

골목길 근대사

조선중화를 외치면서 금수강산을 두 발로 걸어서 두 높은 문화를 창조한 조상들처럼 나도 걸었다. ‘조선 방방곡곡을 걸어서 진경산수화로 그려내고 진경시로 읊었던 우리 역사를 서촌에서 보았다.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에 짓밟히지 않으려고 발버둥 쳤던 우리 조상들의 안타까운 땀방울을 정동에서 보았다. 대한제국에서 또 다시 왜적들에게 침탈당하면서도 민족의 드높은 문화만은 지켜서 장차 나라를 다시 일으키고자 애 썼던 서울 동촌과 목포 개항장을 걸었다. 광복의 감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성큼 찾아 온 전쟁의 비극을 더불어 사는 지혜로 이겨낸 부산 산동네를 걸었다. 모든 것을 낫게 하는 사랑으로 동족상잔의 죽임마저 치유한 신안군 증도를 걸었다’(최석호 외, 2015: 221). 걷는 만큼 본 우리 근대사를 한 권 책으로 폈다. 《골목길 근대사》가 바로 그 책이다.

문화대국 조선

《골목길 근대사》의 자양분은 18세기 3대 연행록(김창업, 1976; 홍대용, 1974; 박지원, 2010)과 정옥자 선생의 조선중화 연구(정옥자, 1998; 2012)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많은 우리 그림과 도자기 등 우리 문화에 대한 해석은 우현 고유섭 선생의 역작(고유섭, 2007)에서 주로 아이디어를 얻었다.

표지

참고문헌

고유섭. 2007. 《우현 고유섭 전집》 열화당.
金昌業. 1976. 《燕行日記》 권영대·이장우·송항룡 공역. 민족문화추진회.
朴趾源. 2010. 《熱河日記》 고산 역. 동서문화사.
이경구. 2007. 《조선 후기 안동 김문 연구》 일지사.
정옥자. 1998. 《조선 후기 조선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정옥자. 2012. 《지식기반 문화대국 조선 – 조선사에서 법고창신의 길을 찾다》 돌베개.
최석호·박종인·이길용. 2015. 《골목길 근대사》 시루.
洪大容. 1974. 《湛軒燕記》 민족문화추진회.
Elias, Norbert. 1987.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최재현 역. 나남.
Elias, Norbert. 1996a. The Germans. translated by Eric Dunning & Stephen Mennell. Polity.
Elias, Norbert. 1996b. 《문명화과정 Ⅰ》 박미애 역. 한길사.
Elias, Norbert. 1999. 《문명화과정 Ⅱ》 박미애 역. 한길사.
Elias, Norbert. 2003. 《궁정사회》 박여성 역. 한길사.
Elias & Scottson. 2005. 《기득권자와 아웃사이더》 박미애 역. 한길사.
Giddens, Anthony. 1998. The Third Way. Po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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